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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법칙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한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 사람들이며 성공한 해커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해커들이 무엇을 목표로 보안망과 전산망을 해킹하는가를 알아야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일부 해커들은 타인의 파일에 손상을 입히거나 아예 하드 디스크를 통째로 파괴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크래커(cracker) 또는 반달(vandal)이라고 부른다. 일부 풋내기 해커들은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단순히 해커 툴을 다운로드받아 컴퓨터 시스템에 침입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류는 스크립트 키디(Script kiddie)라고 부른다

크래커의 나이는 대개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크래커 중에서 뛰어난 실력자는 엘리트(Elite)라고 부른다.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혀 이런 해킹 툴을 만들어 배포하는 해커들도 있다. 이런 부류는 크래커와 구별하여 해커라 부른다.
크래커와 마찬가지로 해커에도 다양한 이름이 있다. 해커 중에서 뛰어난 실력자를 마법사(Wizard)라고 부르고,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을 구루(Guru)라고 부른다. 이 때 구루란 산스크리트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크래커와 해커는 실력의 차이를 떠나 가지고 있는 사상도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단순한 치기나 개인의 이익이 아닌 무언가의 목표를 크래커와는 달리 해커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목표가 정치적일 수도 있고 사회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고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 즉 종교적 관점에서 해커의 해킹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주제는 매트릭스와 공각기동대, 두 영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매트릭스는 해커가 주인공(네오와 트리니티는 둘 다 해커이다. 특히 트리니티는 국세청을 해킹한 전설적인 해커)인 영화이다. 그리고 공각기동대는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네트워크 속으로 사라진다. 도서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해커의 종교심리학적 분석을 이 영화들은 수행하고 있다.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저가 될 필요는 없다"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잠언을 인용한다면 이 영화들을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해커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이 왜 크래커와 구별되어야 하는 지도 알 수 있다.

"해커를 이해하기 위해서 해커가 될 필요는 없다."

2. 구루와 위저드
구루는 요가의 스승을 뜻하는 용어이고 위저드는 중세의 마법사이다. 왜 해커의 실력자들을 구루와 위저드라고 할까?

구루는 원래 ‘무겁다’는 뜻이었으나, 전화되어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존경하는 장로(長老)나 한 교단(敎團)의 통제자에 대한 존칭으로 통한다. 그리고 위저드는 마법사란 뜻도 있으나 놀라운 솜씨를 가진 사람,귀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구루의 교단의 통제자란 의미를 통해 본다면 해커집단은 스스로를 교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확실히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모피어스가 해커집단의 구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보자면 네오는 해커 이전에 구루(모피어스)가 섬기는 구세주이다. 이것은 네오(neo)를 거꾸로 하면 One이 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듯이 Neo는 One의 애너그램이다. 애너그램은 같은 철자를 재구성하여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로 바꾼 것을 말한다. 절대자 니오는 하지만 굉장히 neo하다. neo가 새롭다라는 뜻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트리니티는 막달라 마리아로 이해된다. 해커집단이 종교집단이라면 구세주, 교단의 통제자(기독교의 베드로,즉 그후손 카톨릭의 교황), 교리(도그마)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교리가 기독교적인가? 그 구세주는 어떤 사람인가?

3. 기독교적 관점
해커들이 집단을 이루어 행동하고 기술과 사상을 교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세계에도 독불장군은 없는 것이다. 비록 네트워크에서의 교류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현실이다. 온라인 게임에 중독돼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해커집단의 구루는 사이버 세계의 교황이다. 그러나 해커집단의 교리는 종교다원주의와 다신론에 가깝다.

우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교리를 보면 기독교는 한마디로 유일신과 그의 아들, 그의 영혼(성령, Ghost)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삼위일체가 바로 그 것이고 수많은 해커들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 종교이다.(해커의 많은 수가 서구 출신이다.)
역시 영화 매트릭스는 이 삼위일체 도그마를 영화에 도입한다.(여주인공 이름인 트리니티는 삼위일체라는 뜻)
그러면 해커집단의 구세주는 과연 누구인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구세주인 네오의 인성은 사실 고유한 인간이라기 보단, 변수를 발생시키고 슈퍼 해킹의 속성을 지니게 되는 일종의 프로그램이 인간의 정신작용 속에 잠재된 인성으로서, 매트릭스(즉 아키텍트)가 체제 리로딩이나 테스트를 위해 일부러 용인하고 오러클로 하여금 모니터링 하는 가운데에서 인간에게 영향받아 발현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위치상으론 인간과 기계의 중간선상, 속성으로는 양 속성을 함께 지닌 존재인 듯하다.

매트릭스는 기독교 코드를 의도적으로 시나리오에 끌어들였다. 그건 매트릭스 감독 워쇼스키 형제의 문화적 배경 탓이겠지만 이 사랑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예수가 가지고 온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감정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종교적 개념화 상징화한 것이 바로 예수이며, 그리고 여기 매트릭스의 기계입장으로는 코드화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기독교적 사상관을 비틀어버린 것이라기보단 좀 다른 분야에서 제대로 적용을 했다 보면 될 것이다.

일단 감독은 처음부터 기계 세상의 메시아로서 네오를 설정한 것은 맞다. 네오의 존재가 기독교의 예수에 비견되는 것은 이런 의미 때문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네오의 행보가 예수의 구도과정을 비슷하게 따라가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네오의 존재가 기계적 요소, 즉 프로그램 속에서 튀어나온 의식체(이건 시스템이 만들어냈다기 보다는 변수로 인해 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공각기동대에서 정보의 바다에서 탄생한 유사의지 또는 유사생명의 개념이라 보면 된다.) 와 함께 인간의 육신에 담겨있는 고유의 정신체 둘 다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자 동시에 신의 아들로 설정되는 것과 같은 위상이다.
또한 예수가 선민들(유대인들)만의 종교 속에 보편 타당한 사랑의 가치를 집어넣어 만인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이 네오는 그 사랑의 요소를 인간만의 것에서 기계들의 것으로까지 확대시켜 놓은 존재이다. 즉 예수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었듯 네오 또한 인간들만의 메시아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네오는 순교하게 되며 그 순교 후 기계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장면도 예수의 십자가 하강장면과 유사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형상의 빛 무리는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워쇼스키 형제는 말미까지 애매모호하게 뭐라 딱히 그의 위상을 결정짓지는 않다가 최후의 순간 네오라는 존재가 이 시대의 메시아이며 십자가의 예수라는 노골적인 징표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목숨을 거둔 순간에 비견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승천할 때의 표식과도 같은 것이다.

사이버펑크는 기계, 인간, 영혼과 프로그램을 구별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해커영화이자 사이버펑크 영화인 매트릭스에서 구세주인 네오는 진화한 인간인 것이다. 역시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은 전뇌(전자회로로 대체한 두뇌)화된 인간이며 컴퓨터 프로그램과 융합하여 광대한 네트(Net)속으로 승천한다. 이 역시 진화한 뉴타입(애니메이션 건담용어로) 인간이다.

예수는 성경에서 자기를 닮으라고 명령한다. 현실의 해커집단의 구세주격인 네오 역시 해커가 닮아야할 대상이고 목표인 것이다.


4.불교적 관점
사실 해커들의 교리는 기독교보다 불교 또는 힌두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루라는 용어 자체가 힌두와 요가의 용어이다.
어쨌든 불교의 수행의 근본은 해탈이다.

해탈은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인도사상(印度思想)·불교는 이것을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였다. 즉 범부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결국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三界:欲界·色界·無色界)를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無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불교의 해탈은 자각,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와의 차이점이다. 기독교는 믿음으로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즉 타율적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내에서 깨달은 자들은 시온의 전사들의 깨우침을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선각자를 통해서나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깨닫기도 한다. 이런 깨달음을 종교적으로 해탈, 자각, 혹은 진리의 통달이라고 한다.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매트릭스 내의 세상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물리적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어 공중에 뜨기도 하고, 어린 동자승일지라도 숫가락을 염력으로 구부리기도 하고, 각종 신통한 능력을 발휘한다(매트릭스 1). 또한 애니 매트릭스를 보면, 어떤 육상 선수가 자신의 능력 밖으로 달려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데, 이 순간 근육이 파열되면서 이 세상이 허상임을 그 즉시 깨닫게 된다.

즉, 해커들은 해탈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 해탈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부딪힌다. 이 의문에 대해서 성찰하는 또다른 해커영화가 공각기동대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뮬레이션과 자아의 개념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정보활동의 일종인 시뮬레이션은 느낌과 생각, 그리고 자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자아의 본질에 대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준다. 우리의 자아 역시 시뮬레이션의 일종이라는 사실이다.

철학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지금도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는 주제는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규정하는데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자아이다. 자신 스스로를 인식하며 여러가지 사고작용을 제어하는, 인간 사고능력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인간자체를 규정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자아이다.

이 자아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 내가 앞을 보고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는 그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주변의 물질들과는 다른, 정신세계에 위치한 이 자아는 한편으로 신비스러운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동물과 기계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여 오로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으로 믿어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자아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낸다는 것은 인류역사에 기록될만한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시뮬레이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그 자아의 정체에 대한 의문에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자아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뇌에 대한 이해로부터 그 실마리가 풀린다. 뇌는 뉴런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사고활동은 모두 이 뉴런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자아는 이 뉴런들로 구성된 뇌에 의해서 시뮬레이션 된 결과이다. 뇌는 뉴런이라는 소자로 구성된 컴퓨터로 자아를 시뮬레이션해내어 사고를 하고 생존에 필요한 활동을 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뇌가 시뮬레이션한 자아와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한 자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놀랍게도 이 둘사이에는 근본적인,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생물학적인 세포인 뉴런을 전자뉴런으로 대체하여 뇌를 부분적으로 전자화하는 경우에도 자아는 그대로 유지되며, 나아가 뇌 전체를 전자뉴런으로 대체하여도 자아가 유지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기계가 시뮬레이션한 자아 역시 인간과 동일한 자아가 되는 것이다.

뇌는 시뮬레이션을 위한 장치이며 자아는 바로 시뮬레이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자아의 정체가 바로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기쁨, 슬픔, 사랑 등의 감정과,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오감의 느낌들의 정체 역시 이 시뮬레이션이 본질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자아와 감정, 감각의 본질이 시뮬레이션이라면, 뇌에 의한 시뮬레이션이 아닌, 컴퓨터 전자회로에 의한 시뮬레이션 역시 동일한 느낌과 감정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와 감정, 감각이 시뮬레이션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은 과거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물질과 같은 구체적인 형체가 없는 정보활동이다. 우리의 자아와 감각이 정보활동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정보활동이 의식과 감각의 본질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정보란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인 것으로만 믿어왔다. 정보활동에서 자아와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정보와 그 활동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사실은 정보활동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은 정보와 정신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필요로 한다.

최근의 뇌에 대한 연구는 자아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다. 자아는 하나의 단일한 구성체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 이상이 모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 CPU칩 두 개를 동일하게 작동하도록 병렬적으로 연결하여 가상현실속의 인공지능의 뇌로 사용한다면 그 인공지능의 자아는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연결한 두 칩을 각기 따로 작동하도록 분리해 버린다면 자아가 두 개가 된다. 이는 정보활동으로서 자아를 이해하게 되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런데 인간에게서도 자아가 분리되는 동일한 실험이 이미 발견 되었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 두개의 거의 유사한 작용을 하는 장치가 병렬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1950년대 이 둘의 연결을 분리시키는 수술이 행해진 후, 자아가 좌우 두개로 분리되는 현상을 발견하였으며(좌우대뇌사이의 연결만 절제하여 기억과 감정은 공유함), 연구자는 이 발견으로 1981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 발견은 인간의 자아가 뇌에 의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시뮬레이션과 정보활동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 역시 영화나 문학작품으로 쓰일만한 좋은 주제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설명한 자아에 대한 관점은 지금 이 시점에도 너무나 새로운 진보적인 관점이라서 아직 영화에 실현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이미 1995년 공각기동대(영문제목: Ghost in the Shell)에서 아주 정확하고 심도 있게 다뤄졌다.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은 전뇌(전자회로로 대체한 두뇌)화된 인간이며, 어느날 순수한 컴퓨터 프로그램(인형사)이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라 주장하며 새 안드로이드의 전뇌에 침투해 들어갔을 때, 주인공은 의문을 품게 된다. 순수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는 사람처럼 자아를 가지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일까? 단순한 프로그램이 그렇다면 내 자아도 프로그램은 아닐까? 주인공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인형사 몸으로 다이빙하여 관객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보는 눈을 통해 주변을 볼 수 있게까지 시도한다.

이 작품의 영문제목에 영혼(ghost)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이 작품이 인간의 자아(이 작품에서는 자아를 'ghost'로 칭함)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이 전뇌를 해킹하는 해커가 등장한다. 누군가 내 머리를 해킹한다. 그리고 기억을 모두 바꿔 버린다. 가까운 미래에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럼ㄴ 두뇌를 전뇌화시키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공각기동대에서 이런 장면이 있다. 빠른 키보드 조작을 요하는 오퍼레이터들은 손을 손가락이 수십개씩 달린 기계손으로 바꾸었다. 네트워크 접속이 일상화되고 정보를 누가 빨리 취득하고 분석하는가가 생존의 필수요건이 되는 세계에서는 두뇌에 컴퓨터칩을 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 MBC뉴스 시간에 내 귀에 도청장치가 달려있다고 절규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광인으로 취급하던 그 청년의 절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공각기동대,이 작품의 배경은 중앙 컴퓨터와 개인의 전자 두뇌(전뇌 : 電腦)를 연결하는 정보망 속에서 개인의 내밀한 기억마저 조작 가능한 사회이다. 즉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사회, 즉 차별이 없는 무차별의 사회이다.

여기서 차별,무차별이란 빈부격차같은 사회적 용어가 아니라 불교 용어이다. 불교에서 차별의 세계가 바로 생명의 세계이다. 차별이란 열역학 제2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세포벽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생명이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열역학 제2법칙을 철저히 무시한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라!

해탈이란 무차별이다.

5. 유대교(카발라)적 관점

쿠사나기 소좌와 인형사는 구(舊) 시가의 폐쇄된 박물관에 나란히 누워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나무의 모양으로 형상화했다는 생명의 나무 아래에서 융합 과정이 진행된다. 인형사도 아니고 쿠사나기 소좌도 아닌, 새로운 존재의 탄생.



생명이 바다에서 탄생했듯이, 미래 사회의 새로운 생명은 정보의 바다에서 탄생한다.

생명의 나무는 진화의 상징이다. 앞서의 기독교적 관점의 영화 매트릭스는 현대 포스트모던신학의 한 유파인 창조진화론과 생태신학을 많이 차용한 것 같다. 불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공각기동대는 해탈(무차별)의 디스토피아(?)을 그려냈다.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는 생명 즉 진화의 상징인 생명의 나무로 유명하다. 역시 공각기동대에서 그 생명의 나무가 등장한다. 매트릭스도 마지막에 네오가 죽는 장면에서 십자가 모습으로 죽는다. 십자가 역시 나무이다.

공각 기동대는 기원의 순수성이나 기원의 고유함을 승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순정한 기원일 수 없으며, 기원은 순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혼종(混種)적인 것이라는 사실의 긍정. 다윈의 진화론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진화론에서 인간은 진화의 과정 속에 놓여진 하나의 단계이다.

따라서 인간이 변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의 흐름은 생물학적인 차원에 국한해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생물학적인 단계에서 기계공학의 단계로 비약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인간은 결코 순정한 기원도 아니고 절대적인 가치도 아니다. 인간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잡종(hybrid)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이보그인 쿠사나기 소좌와 프로그램인 인형사가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인가? 아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새로운 존재, 또는 새로운 생명이다.

어떻게 사이보그와 프로그램의 결합에서 생명을 말할 수 있는가? 생명과 정체성이라는 관념이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유기체에게만 배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관습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계에도 정체성이 있으며, 기계를 작동하는 프로그램은 인간의 유전자 프로그램과 같은 수준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또한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서, 스스로를 만드는 기계라는 이미지를 승인하는 것은 어떨까? 바다에서 생명체가 생겨났듯이, 정보의 바다에서 생겨난 새로운 생명(존재)은 다시 진화의 과정을 밟을 지도 모른다. 공각 기동대는 진화의 새로운 시계를 꿈꾼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이고…. 네가 지금의 너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집착이 너를 계속해서 제약한다."

생명의 나무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겔리온에도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차별, 무차별의 불교적 코드, 그리고 기독교적 코드(에반겔리온이라는 제목 자체가 복음이라는 뜻이다.) 모두 이 애니메이션의 주요 소재로 쓰인다.

에반겔리온 역시 진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창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창조는 현재진행형이다.

6. 맺음말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매트릭스는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영화이다. 그러나 물량만 엄청난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해커의, 해커에 의한, 해커를 위한 영화이다.

공각기동대는 일본 극장 개봉시 12만 관객이 들어간 한마디로 흥행에 실패한 영화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하는 컬트 영화가 되었다.

지금도 해커가 아닌 크래커들은 눈을 부릅뜨고 먹이감을 찾아 네트워크를 떠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방화벽과 패치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창과 방패의 대결은 반복된다.

그러나 여기 반복과 복제가 아닌 진화를 꿈꾸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진정한 해커이다. 그들 선구자들이 여는 미래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진화는 계속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과 생각이 어린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는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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