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무술 이야기

형의권의 기원과 발전사 [퍼온글]

무술 2004.07.24 10:23 조회 수 : 2231



제1절 형의권의 기원
형의권의 기원 문제에 관해서는 일찍이 송대(宋代)의 명장인 악비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료의 고증을 거친 결과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전인(前人)들이 악비의 사람됨이 진충보국하고 금나라에 항거한 민족영웅으로 존중하였으니 이것으로 형의권의 지명도와 호소력을 높이려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근래에 많은 권술사가(拳術史家)들이 형의권의 기원에 대하여 대량의 조사와 연구를 하여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비록 관점의 차이가 있고 각 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형의권은 심의육합권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설은 전국 각지의 형의권가들이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만일 형의권이라는 세 글자로써 이름한 권술 이라면 이는 하북성의 이낙능(李洛能)을 시조로 삼는다. 그러나 이낙능은 대룡방(戴龍邦)에게 배웠고 대룡방은 조계무(曺繼武)에게 배웠으며 조계무는 희룡봉(姬龍峰)에게 배웠다.

희룡봉은 심의육합권의 시조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많은 사람들의 고증을 거친 것으로 특히 황신명(黃新銘)은 수 차례의 조사와 연구, 실지 고증을 거쳐 대량의 자료를 수집하여 <형의권기원고(形意拳起源考)>와 <희제가생평초탐(姬際可生平初探)>를 써냈다. 이는 객관적인 역사의 기초에서 볼 때 과학성과 비교적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심의육합권은 희룡봉을 시조를 삼고 형의권은 이낙능을 시조로 삼는 것이다.
현재 세상에는 "삼류일원(三流一源-세 물줄기가 하나에 근원 한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형의권의 삼대지류인 산서(山西), 하북(河北), 하남(河南)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은 지역에 근거하여 구분한 것으로서 모두 심의육합권보(心意六合拳譜)의 기초 위에서 발전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하남 지역에서는 심의권이라고 부르고 단지 산서와 하북에서 형의권이라 칭하고 있는데 기실 산서와 하북의 것은 그 발생이 같은 것으로 모두 이낙능이 전한 것이다.
단지 지역과 서로의 풍격이 다를 뿐이다.

하남 지역에서 유전하는 파들은 기본적으로 심의육합권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니 그것은 마보(馬步)와 십대형(十大形)을 위주로 하고 있다. 청조(淸朝) 건륭(乾隆) 년간에 심의육합권은 이미 자신의 기술과 이론체계를 형성하였고 산서와 하남에서 널리 유전되었다. 특히 하북의 이낙능은 대룡방에게 10년을 배운 후 이 10년의 학습과 연마, 각고의 연구와 실천의 깨달음을 통해 기예의 수준이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낙능은 육합심의권을 배우기전에 이미 다른 권술을 배워 깊은 무술의 기초를 갖추었으므로 수 십년 연공의 체득과 경험, 실천과 총괄, 학습과 연구 등 이러한 누적의 효과가 필연적으로 무술 단계의 끊임없는 심화와 증가를 낳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시기에 이르자 필연적으로 기술의 내함(內含)에 관한 강렬히 승화된 이론체계와 문화가 귀속되는 내재적 요구와 필요를 낳은 것이다.

이낙능은 바로 이러한 누적된 효과 속에서 심의육합권을 개혁하고 새롭게 하려는 동기를 싹티워 심의권을 형의권으로 고친 것이다. 명칭으로만 보면 단지 심(心)자를 형(形)자로 글자 하나만 고친 것인데 심(心)과 의(意)는 고대 중국어에서는 잘 확정되지 않고 심(心)자 중에도 의(意)의 성분이 있고 의(意)자 중에도 심(心)자의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이낙능은 심(心)자를 형(形)자로 바꾸었으니 이리하여 형의권이 탄생한 것이다. 대략 1856년 경에 형의권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외부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심의권과 형의권은 글자 하나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권법의 역사상에서는 하나의 개혁적인 이정표로서 무술의 화원 속에 한 아름다운 내가권인 형의권이 더해진 것이다. 이낙능은 결코 간단히 글자 하나만 바꾼 것이 아니고 그의 필생의 심혈과 수 십년의 연공의 체득과 실전 경험의 총괄을 가지고 대담히 심의육합권에 계통적인 정리를 가하여 먼저 삼체세(三體勢)의 참장으로 입문을 삼고 오행권을 기초로 하며 12형권으로 전진의 계단을 삼은 계통적인 기술 훈련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중국 고대 문화의 음양오행 학설의 이론 기초와 도가의 양생, 연공, 수련의 방법과 이론에 권술의 내양 수련을 결합하여 무공 수련의 3가지 층차(즉, 연정화기(練精化氣), 연기화신(練氣化神), 연신환허(練神還虛))의 이론을 제시하여 형의권이 참신한 면모와 기술의 계통화와 이론의 과학화(당시로써 말하자면)를 가지고 무림에 우뚝 솟게 만든 것이다.

비록 형의권 이론의 핵심은 부분적으로 심의육합권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질적인 방면에서는 비약적인 결과를 가져와 한 단계 발전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어떤 권종이라도 그것을 성립시키고 더욱 빛나게 하며 이론을 완전하게 하고 기술의 체계를 부단히 풍부하게 하는 것은 후대인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며 형의권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현재 전국 각지에 유전하는 형의권은 이론체계와 기술체계에 있어서 이미 상당히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이낙능의 2대, 3대, 4대로부터 5대, 6대에 이르는 제자들의 계속적인 발양과 부단한 보충의 결과이다.

나는 사회의 부단한 진보와 과학기술의 부단한 발전에 따라 이후에 더욱 많은 형의권 애호가들이 형의권에 대해 끊임없는 노력과 토론을 하고 형의권의 이론과 기술을 더욱 과학화, 현대화 하여 전인류에게 도움을 주리라고 믿는다.



제2절 근100년 간의 형의권 발전사
명말(明末)에서 청초(淸初)의 시기에 산서 지방의 만주인인 희제가(姬際可)가 만든 심의육합권은 조계무(曺繼武)에게 전해졌고 조계무는 대룡방(戴龍邦)에게 전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대가(戴家)에서는 심의권이라 부르고 결코 형의권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 대가에서는 이 권술을 보물처럼 여겨 외지인 에게는 전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널리 유전되지 못하였고 단지 이낙능 한 사람에게만 전해졌다.

이낙능은 대룡방에게 10년을 배운 후 형의권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낙능이 외지인 에게 심의권을 전하지 말라는 선생의 명을 어길 수 없어 형의권이라 이름을 고쳐 제자에게 전한 것인지도 모르나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낙능이 형의권을 제자에게 전한 이래로 형의권은 세상에 널리 유전되었고 형의권이 전국 각지에 널리 꽃을 피우는 커다란 국면을 만들었다.

과거에 무술의 전파는 모두 선생의 구전과 몸으로 전하는 것에 의지했다. 이낙능은 결코 자기가 수 십년 연공 하여 얻은 경험의 총체와 귀납하고 정리한 형의권을 집안의 비밀로 하지 아니하고 그 높은 무공의 기예로써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니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배운 것이다.

1856년 전후로부터 이낙능은 형의권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참된 전함을 얻은 자는 10명으로 그들은 다음과 같다. 유기란(劉奇蘭), 곽운심(郭雲深), 백서원(白西園), 이태화(李太和-이낙능의 아들), 차의재(車毅齋), 하운형(賀運亨), 이광형(李廣亨), 송세영(宋世榮), 장수덕(張數德), 유효란(劉曉蘭) 이다.

그 중에서 전인(傳人)이 가장 많고 공헌이 가장 큰 자는 유기란, 곽운심, 차영굉, 송세영, 이태화의 5인이다. 추측건대, 이낙능에게 권법을 배운 자는 훨씬 많았겠지만 단지 이들처럼 명성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1900년대부터 교통의 발달, 교육의 흥기, 도시경제의 흥성으로 농촌에서만 생활하던 기예의 대가들이 분분히 대도시로 한꺼번에 들어와 자신의 무예를 발휘할 곳을 얻었으니 상인들은 그들을 상품보호요원(보표)으로 청하였고 학교에서는 교사로 청하였으며 군대에서는 교련으로 청하였고 관리나 귀족들은 그들을 통해 건강한 몸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우수한 권사들이 한층 더 빛나고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게 되었다.


형의권은 그 동작이 간결하고 실용적이며, 실전에 강한 기격성 때문에 무림에 이름을 드러내었고 무림계의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이낙능의 10대 제자들은 스스로 문호를 세우고 가르쳐 형의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로부터 형의권을 연습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선배의 기예를 이어받은 기초 위에서 자신의 수 십년 간의 연공과 실전의 체득을 결합하고 중국고대의 음양학설로 이론기초를 삼고 오행의 생성변화로 방법론을 삼으며 전통적인 중의학 이론으로 내공 수련 방법을 삼고 도가사상문화의 정화를 흡수하여 형의권의 이론과 기술이 부단히 완전하고 승화되도록 하였으니 주로 사상의 층차, 기술의 층차, 내공수련의 층차의 방면에서 드러나 있다.

형의권의 전파를 살펴보면, 중국은 20년대에 중앙국술관이 성립되었고 각 성(省)과 시(市)에는 무술학교가 건립되어 형의권이 비교적 좋은 성적을 얻게 되어 형의권의 선양과 전파에 극대한 촉진 작용을 하였다. 전국 각지에 형의권을 넓히고 발전시키는 면에 있어서는 유기란(劉奇蘭), 곽운심(郭雲深), 이존의(李存義), 유전침(劉殿琛), 손록당(孫祿堂), 황백년(黃栢年), 설전(薛顚), 강용초(姜容樵), 상운상(尙雲祥), 근운정(靳雲亭), 허우생(許禹生), 경기선(耿其善), 장점괴(張占魁) 등의 사람들이 공헌하였는데 전인(傳人)들이 비교적 많고 저작도 있다.

산서성에는 여전히 차의재(車毅齋)와 송세영(宋世榮) 두 사람의 제자와 재전제자(再傳第子)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고 인원도 가장 많아 지금까지도 산서성에서 형의권을 연습하는 자들은 대부분 모두 이들 두 사람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형의권 기술체계의 충실함과 전체성을 살펴보면 현재 세상에 유전되는 형의권의 기술체계는 아래와 같다. 오행권(즉, 벽(劈), 붕(崩), 찬(鑽), 포(砲), 횡(橫)의 다섯 권), 12형권(즉, 용(龍), 호(虎), 후(猴), 마(馬), 사(蛇), 계(鷄), 연(燕), 요(鷂), 대(鴕), 타(鼉), 응(鷹), 웅(熊)의 12형), 팔자공(八字功- 즉, 전(展), 절(截), 과(裹), 과(跨), 도(挑), 정(頂), 운(雲), 령(領)의 여덟 가지)은 단련(單練) 권법이다.

단련(單練) 투로에는 아래와 같이 오행연환권(五行連環拳), 오행합일(五行合一), 팔식권(八式拳), 12홍추(洪捶), 출동입동(出洞入洞), 잡식추(雜式捶), 팔자공연환권(八字功連環拳), 사파권(四把拳) 등이 있다.

병기 방면에는 오행권에 의거하여 이름한 오행도(五行刀), 오행검(五行劍), 오행창(五行槍), 오행곤(五行棍) 및 12형검(形劍), 12형창(形槍)이 있다.

병기 투로에는 연환도(連環刀), 연환검(連環劍), 연환창(連環槍), 연환곤(連環棍), 삼재검(三才劍), 행보육검(行步六劍), 육합도(六合刀), 육합창(六合槍), 인각도(麟角刀) 등이 있다.

대련 투로에는 오행포(五行砲), 교수포(絞手砲 즉, 三手砲), 오화포(五花砲), 안신포(安身砲 즉, 換身砲), 구투환(九套環) 등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형의권가들이 대부분 알고 있고 모두 연습하는 것들인데 각지의 권사 선배들도 자신의 투로를 만들었으나 널리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그 중에 없을 뿐이다.

이러한 기술체계의 형성은 역대의 형의권 선배들이 사회적 필요를 위하여 부단히 충실하게 발전시켜 온 것이고 군중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사회의 발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 내용은 모두 전인(前人)들이 누적한 경험의 결정체이므로 이러한 경험을 계승하고 학습하며 그 정화를 흡수하는 것은 바로 형의권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일환이며 또 금후의 형의권의 발전에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

형의권의 이론 설정 방면에 있어서는 사회의 진보와 과학의 발전 그리고 인류 문화 수준의 부단한 향상에 따라 형의권의 이론 역시 부단히 승화하고 있다. 20세기 초의 2, 30년대에 형의권의 선배들은 분분히 책을 쓰고 학설을 세워 전인(前人)을 계승하고 총괄하는 기초 위에서 자신의 연공 체험을 결합하고 중국 전통 문화인 유가(儒家), 도가(道家)로써 주요 핵심을 삼고 중의학 이론과 경락 학설을 흡수하여 형의권 이론 체계의 완성에 있어서 앞 세대를 잇고 뒤 세대를 여는 작용을 하였다.

더욱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존의, 손록당, 유전침, 강용초, 근운정, 설전, 황백년 등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권보와 저술을 내놓았다. 이존의는 <형의권보(形意拳譜)>, 손록당은<형의권학(形意拳學)>과 <권의술진(拳意述眞)>, 강용초는<형의모권(形意母拳)>,<형의잡식추팔식(形意雜式八式拳合編)>,<형의권안신포(形意拳安身砲)>,<형의12목(形意12目)> 등의 저작이 있는데 형의권 방면에서 강용초는 가장 저술이 많은 사람이다.

유전침은 <형의권결미(形意拳抉微)>를 저술하였다. 그는 남들보다 앞서 서양의 해부학, 운동 근육학을 운용하여 형의권의 동작을 그림을 그리고 해설하였는데 시대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깊이 들어 가지는 못하였으나 해부학설을 운용하여 중국의 전통 무술에 결합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은 아마도 전체 체육계에서 유전침이 최초일 것이다.

근운정의 <형의권오강칠언론(形意拳五綱七言論)>과 <형의오행권도설(形意五行拳圖說)>은 가결의 형식으로 동작의 과정, 요점과 용법 등을 서술한 것이 주로 두드러진다. 설전의 <형의권강의(形意拳講義)>는 12형의 동작 내용이 비교적 풍부한데 그것은 이낙능의 아들인 이태화, 이태화의 아들인 이진방 계열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황백년의 저작은 <형의권계교범(形意拳械敎範)>인데 그는 형의권의 기법을 당시 군대의 훈련에 융합하여 군대의 벽도(劈刀)와 보창(步槍)의 찌르기를 만들었다.

강용초의 저작은 동작과정이 묘사가 비교적 상세하여 기타의 어떤 권보도 그에 비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중앙국술관에서 다년간 국술교재편심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이외에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할 만한 것은 손록당 선생의 1915년에 출판된 <형의권학>인데 유전침의 <형의권결미>와 비교하여 4년이나 이르고 기타의 권보들 보다 14,5년이나 이른 것이다. 손록당 선생은 비교적 높은 문화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선배들의 많은 지도를 받은 데다가 각고의 정밀함과 많은 깨달음을 더하여 전인(前人)들의 기초 위에 형의권에 대해 계통적인 정리를 하였으니 유학(儒學)으로 핵심을 삼고 도가(道家) 수신 양생의 이론으로 기초를 삼으며 중의학의 장부(臟腑)와 경락 학설을 결합하고 불가(佛家)도 참고하여 형의권 체계를 제시하고 건립하였다.

그의 또 하나의 저작 <권의술진>은 많은 선배들의 연공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가 생각건대, 이러한 이야기와 관점 그리고 연공의 심득과 깨달음들은 모두 손록당 자신이 총괄하고 깨달은 것이니 단지 전인(前人)들의 도움을 빌리고 자신을 낮추려 한 것일 뿐인 것 같다. 그러므로 손록당 선생의 <형의권학>과 <권의술진> 이 두 권의 책은 형의권 발전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전통문화를 가지고 민간의 형의권에 계통적인 정리와 문화적 융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의권을 <권학>의 높이에 까지 끌어 올려 보았으니 비교적 높은 문학적 수양이 없으면 이 점을 볼 수 없다. 손록당 선생은 형의권의 연구, 발전, 전파에 있어서 획기적인 추진 작용을 하였으니 일대의 종사요, 일대의 대가라고 하기에 부끄럽지 않다.

그는 비단 형의권 방면에서만 이런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팔괘장과 태극권 방면에서도 당시에 뛰어난 인물로서, 손씨태극권을 창시하여 세상에 남겨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신중국 건립 후 2,30년간에는 단지 53년 천진(天津)에서 거행된 전국민족형식표연대회에서 중국전통무술의 시범이 있었고 그 후 1979년에 와서야 제1차 전국무술참관대회가 거행되어 민간의 전통무술이 보여지는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에는 역사적 원인이 있으니 중국은 해방이후에 정권이 공고해지고 경제가 발전하였다.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국가가 모두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삼고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독재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였던 것이니 국민당 시기를 거쳤던 무술계의 대부분의 선배, 명인과 무술 고수들은 모두 당시 사회투쟁의 대상이거나 계급의 적이었으며 정권 장악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역사상으로, 혹은 많게 혹은 적게 모두가 정치적 오점이 있었으나 이것은 역사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무술의 계승과 발전의 면에서는 확실히 많은 성과가 있었으니, 우리는 역사적이고 전면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지 역사로 인하여 모든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국문화혁명 이전의 2,30년 중에 중국 민간 무술은 국가의 제창과 발전을 얻을 수가 없었고 국가는 단지 경기 무술을 제창하였을 뿐 그것을 중요한 위치에 놓지도 않았으니 때로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비록 민족 체육이 국가 체육의 100분의 50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자금의 투여와 국가의 그것에 대한 중요성 인식은 50분의 1도 되지 못하였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실행한 이후로 사상의 해방, 경제의 발전이 체육 사업의 발전도 가져와 무술도 이에 상응하여 어느 정도 중시를 받게 되었고 특히 김용(金庸), 양우생(梁羽生)의 무협소설이 전국을 풍미하고 또 영화<소림사>가 전국에 상영된 후에는 전국에 무술의 열기가 형성되었다. 국가에서는 <무술전승의 발굴과 정리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고, 전국적으로 <전국무술참관교류대회>를 거행하였으며 이어서 국가무술원이 성립하였다.

무술잡지가 분분히 창간되고 각 성(省)과 시(市)에서는 무술협회가 성립하니 이러한 것들이 무술운동으로 하여금 왕성히 발전하는 커다란 국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현재 무술은 이미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 무술 발전의 제2의 봄을 맞이 하였다.

중국 민간 전통의 4대 우수 권종의 하나인 형의권은 이러한 매우 좋은 상황 아래에서 1990년에 북경에서 처음 단권(單拳) 형의권참관교류대회를 거행한 이후로 산서, 하북, 산동에서 단권(單拳)의 7차례 전국 및 국제 형의권 초청 경기를 거행하여 극대로 형의권 기술의 교류와 형의권계의 단결을 촉진하였고 형의권이 전국 각지에서 발전하고 적극적으로 세계로 나아가도록 촉진하였다.

근래에 상황의 호전에 따라 형의권 이론의 연구도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많은 무술가와 민간 권사들은 자신의 다년간의 연공의 심득과 깨달음, 이론 연구의 결정과 장악한 기예 투로를 조금의 남김도 없이 모두에게 주어 숭고한 무덕의 모범을 보였다. 그들은 이천기(李天驥), 사국정(沙國政), 장동(張桐), 주영상(周永祥), 오전과(吳殿科), 송광화(宋光華), 장우(張友), 손표은(孫豹隱), 조지청(曺志淸), 유옥환(劉玉垣), 왕건화(王健華), 소경(蘇耕) 등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에 저작을 남겼으며 모두가 다른 각도, 다른 방면에서 형의권에 대해 소개하고 서술하여 커다란 학습, 전파, 향상의 작용을 하였으며 동시에 형의권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조지청(曺志淸)의 <형의권이론연구>인데 이 책은 형의권에 대한 이론 연구 방면에 있어서 권법의 이치와 의학의 이치를 결합하고 형의권의 경력(勁力)에 대해 현대 과학을 적용하여 상세한 설명을 한 비교적 전면적인 저작이다.

장상(張相) 선생의 <형의권실전기법>은 형의권 기법의 실용적 각도에 치중하여 12횡추(橫捶)와 16파대련(把對練)을 해설하였는데 이것은 이전의 모든 권보와 저작에서 다룬 적이 없는 경전투로(經典套路)이다. 풍격과 특징이 뚜렷하고 기법이 간결하고 실용적이다.

송광화(宋光華) 선생은 처음으로 독창적인 풍격을 갖춘 송세영(宋世榮) 선생의 형의권을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소개하였는데 송선생은 가전(家傳)을 이어 받고 그 중의 정수를 얻었으므로 송가(宋家) 형의권의 특징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다.

사국정(沙國政) 선생은 수 십년의 기초를 모아 형의권과 팔괘장을 결합하여 <형의권산수절(形意拳散手絶)>을 만들어 널리 애호가들에게 우수한 투로를 제공하고 형의권의 체계를 풍부하게 하고 충실히 하는데 공헌하였다.

물론 많은 선생과 무술가들이 형의권의 이론 연구와 기술의 탐구에 대해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특히 민간에 흩어져 살면서 형의권을 생명처럼 보고 평생의 연구와 단련을 하는 민간의 권사들은 명예를 다투지도 이익을 다투지도 않으며 단지 정신과 노력을 기울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형의권의 전통과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역시 형의권의 중요한 구성원이며 핵심이니 영원히 우리가 학습하고 존경할 가치가 있다.



제3절 형의권의 금후의 발전과 전망
금후의 사회는 경제적 사회이며 과학기술발전의 사회이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전체 사회의 문화 수준도 부단히 향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무술의 수준도 향상될 것이다. 형의권은 체계적인 무술의 하나이며 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무술의 상업화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 국가에서 전문학자들을 조직하여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데 나는 형의권이, 국가에서 정한 무술의 상업화를 향한 길에서 선두를 달릴 것이라고 믿는다.

형의권 이론 방면에 있어서 선배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자료를 남겼으니 이것은 우리가 학습하고 계승해야 할 고귀한 유산이다. 그러나 시대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에 따라 권술의 이론도 과학화와 현대화를 향해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에 의해 도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전통적인 구전과 몸으로 전하여 대대로 유전되던 교수 방식은 이미 도서의 출판, 음향, VCD의 충격을 받았고 전통적인 기억 방식도 컴퓨터 입력으로 대치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의권도 반드시 사회의 형세에 발맞추어 이론 방면도 현대화를 향해 발전해야 하고 기술 방면도 과학과 규범화를 향해 발전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형의권 중에 포함하고 있는 깊은 철학과 과학적인 이치에 대해 학습, 계승, 연구, 분석하고 전인(前人)의 경험을 총괄하며 동시에 현대적 과학 기술 수단으로 전통 공법(功法)의 메커니즘과 기술체계의 본질 특징에 대하여 연구와 탐색을 해야 한다.

형의권의 기술 동작 방면에서는 현대의 해부학, 운동 생물 역학, 운동학, 생리학 등을 운용하여 동작의 과학화를 탐색한다. 그리고 계통론의 방법으로 형의권의 전체적인 경력(勁力)을 연구한다. 의(意)의 방면에서는 현대의 운동심리학, 훈련심리학 등의 방법으로 다른 의념 활동이 다른 효과를 낳는 구조를 탐색하여 새로운 의념 훈련 방법을 제시한다.

훈련 방면에서는 운동 훈련학의 과학화로 기초를 삼아 기술 체계를 장악하고 기술을 학습하는 시간을 줄인다. 그러나 수련과 깨달음은 평생의 운동이다. 형의권은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어야 하고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향해야 한다.

나는 국가가 정한 <무술발전전략목표구상>에 관한 지도 아래에서 형의권이 하나의 우수한 권종이 되어 반드시 전통을 계승하고 과학과 현대화를 추구하며 민족 문화를 넓히고 민족의 상무정신을 격앙 시키며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중화무술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데 공헌을 할 것이라 믿는다.


-북경형의권연구회장, 저국용(邸國勇)-

-출처: 우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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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중국무술 운영자 2006.05.11 2727
17 매트릭스의 철학,무엇을 말했는가 영화이야기 2005.11.20 1103
16 검술 2 원장 2005.07.18 357
15 격투 3 원장 2005.07.16 442
14 검술 1 운영자 2005.04.27 367
13 소도보 운영자 2005.04.27 399
12 체축 운영자 2005.04.27 564
11 격투 2 운영자 2005.04.27 1015
10 격투 1 운영자 2005.04.27 597
9 화경 운영자 2005.04.27 346
8 권요결 운영자 2005.04.27 298
7 수련에 관하여..... 운영자 2005.04.27 355
6 수련 2 운영자 2005.04.27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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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권의 기원과 발전사 [퍼온글] 무술 2004.07.24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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