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무술 이야기

<무림고수를 찾아서>해탈의 秘技로 번뇌 끊는다  

돌고 돈다. 새벽 이슬을 밟고 해질녘 스산
한 바람을 쐬며 돈다. 내 몸과 자연이 곧 하나일진대, 무술의 경
지는 논해 무엇하겠는가. 산수(山水)를 벗하고 또 스승삼아 무술
수련하는 즐거움이라니….


역경 팔괘철학을 근간으로 한 최고의 장법(掌法)으로 평가받는
고급무술 팔괘장(八卦掌)에 평생을 투자한 기인. 입산 15년여 세
월에 모든 걸 버렸고, 동시에 모든 걸 얻었다. 인적 드문 속리산
기슭에 반듯하게 닦아놓은 팔괘 원주(圓周)는 소우주요, 신성한
제단과 다름아니다. ‘팔괘’는 그의 인생 전부였다.


“마음닦는 공부(功夫)를 하려고 조용하고 호젓한 곳을 찾아온
거죠. 내년쯤엔 속리산 깊숙이 들어가 평생을 지낼 작정이에요.


팔괘장사 임창수(46). 무술에 홀딱 빠진 사람, 팔괘장에 미친 사
람이다. 그의 삶은 도인의 그것과 같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
다. 자연속에 묻혀 지낼 뿐이다. 지금은 속리산국립공원 입구,
터 좋은 곳에 마련된 개인별장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그 인근에 수천개의 돌을 주워다 쌓은 돌담집에서
10여년간 기거했다. 초등학생때 팔괘장을 처음 접한뒤 40년 가까
이 연구에 매진해왔다. 임씨는 기자일행을 마치 가족인양 반긴다
. 사람 냄새가 그리웠을 법도 하다. 그러나 속리산 생활엔 대만
족이란다.


국내 팔괘장의 총본산은 인천시다. 화교 고(故) 노수전 선생이
한국전쟁 직후 인천에 정착, 70년대 후반까지 팔괘무술을 전파했
다. 노 선생은 국내 중국무술의 역대 절정고수중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직도 인천 화교촌엔 그의
전인들이 팔괘장을 연마하고 있다. 임창수도 인천 사람이다. 지
금은 노모(老母)를 돌보러 가끔 들른다. 그의 팔괘장도 노 선생 그
늘밑에 있었다.

임창수는 무술 도적질을 했단다. 훔쳐 배운 팔괘장이다. 가정형
편이 어려워 스승을 모실 엄두조차 못냈다. 현재 인천에서 무예
도장을 운영중인 선배, 동문들이 돈 내고 무술 배울 때 그는 어
깨 너머로 익혔다. 기자에게 건넨 A4 용지 3장 분량의 글에 뼈있
는 말이 담겨있다. ‘훌륭한 스승을 모시는 행운을 가졌더라면
오죽이나 행복했을까….’ ‘한(恨)’으로 남았으리라. 그래도 수련
을 포기하진 않았다. 내부의 선생에 의존해 팔괘장을 익혔고, 그
래서인지 자신의 팔괘를 한국형 팔괘로 칭했다.


각종 병장기를 갈무리해 별장 뜰앞으로 나섰다. 속리산의 올망졸
망한 봉우리들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원주가 떡하니 닦여있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지름 5m 가량의 원주는 팔괘 괘적을 따라 맨
들맨들하게 밟힌 자국이 뚜렷하다. 팔괘장은 주권(走圈), 즉 원
주를 도는 것부터 시작한다. 대개 수련 첫 2년간은 원주만 돈다.
내가(內家) 3권. 팔괘장은 태극권, 형의권과 함께 내기(內氣)
운용을 중시하는 무술로 통한다. 원주를 도는 사이 그 ‘공’이
쌓인다. 묘한 수련법이다. 진흙탕을 걷는 보법이라는 창니보(走
尙泥步) 보법을 택한다. 다리를 끌듯 미끄러지고, 뒤뚱거리는 걸
음걸이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수련해본 이들은 그 공
법에 마력적으로 끌린다. 발걸음도 빨라지거니와 발차기에도 대단
한 힘이 붙기 때문이다.

전설같은 얘기도 많이 전해진다. 이런 것이다. 팔괘장을 처음 익
힌 A는 미친 놈 소릴 들을까봐 한밤중에만 원주를 돌았다. 그것
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남의 묘지에서였다. 그렇게 몇해를 수
련하자 왠지 뭔가 차보고 싶어졌다. 눈에 띈 것이 비석. 그가 뻗
쳐오르는 다리기운을 내뿜으며 돌로 만들어진 비석을 차자 그 중
턱이 거짓말처럼 단번에 잘려 나갔다.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
맞을 걱정에 그길로 상경했다는 등등의 얘기다.

임창수는 30여분 동안 팔괘 투로(套路)를 시연하겠으며, 팔괘 20
00여수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팔괘 창과 검, 봉, 쌍칼, 언월도
순으로 팔괘 병기 무술을 시연했다. 몸에 착 감겨 돌아가는 병장
기 끝에 수련한 세월이 묻어난다. 마지막이 팔괘장 투로. 팔괘
보법에 따라 돌고, 휘둘러치는 원심력과 구심력을 사용한 힘쓰기
가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반질반질한 원주의 일부분만 딛는 그의
발길엔 한치의 오차도 없다. 임씨는 “그렇게 원해도 (나는) 남
들의 무술을 볼 수 없었는데 오늘 기자 양반은 호강한 것”이라
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기자는 인천 팔괘장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이른바 용형(龍形),
또는 유신(遊身) 팔괘다. 청말 동해천 사조가 팔괘장을 창시한뒤
8명의 수제자가 각기 일파를 이뤄 생겨난 팔괘 유파의 한가지다
. 중국에서 최근까지 유행하는 팔괘장은 모든 동작이 매우 유려
하다. 보폭 넓은 보법, 허리와 장(掌)을 치켜든 손놀림이 부드럽
기 그지없다. 그러나 인천 팔괘는 잰걸음에다 뚜걱뚜걱 끊어지는
분절적인 장법의 모습이 뚜렷하다. 다섯손가락을 각기 떨어뜨려
안으로 자연스럽게 구부린 손모양도 독특하다. 임씨의 팔괘장에
도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든 무술이 다 마찬가지다. 손과 발의 힘은 원활한 허리와 굳건
한 다리에서 솟아나는 법이다. 그런데 임씨 투로동작엔 중간중간
허리가 보일듯 말듯 돌아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간파되지 않
는다. 중국식 팔괘와 원리는 같되,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했다.
발 앞꿈치를 안으로 틀어놓거나 원을 더 크게 도는 것과 같은 ?
孤湧?특징이란다. 그러더니 임씨는 돌연 그 이유를 발경(發勁)
으로 설명한다. 중국 무술의 신비감을 무한대로 부풀려 놓은 게
발경법이다. 장풍을 쏜다느니, 태산도 무너뜨릴 힘으로 사람을
쳤다는 얘기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일반인들이 허무맹랑하다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중국 무술가뿐 아니라 현대
격투가들도 따지고 보면 나름의 발경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1
톤’(검증된 사실은 아니지만)의 위력이 담긴 펀치를 구사한다는
마이크 타이슨도 발경법을 쓴다고 풀어낸다. 무술가들은 먼저
타이슨의 무시무시한 허리놀림에 주목한다. 핵주먹의 위력은 모
두 허리에서 토해진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스피디한 주먹을 내
쏜다. 거구의 상대가 질풍처럼 달려드는 찰나에 묵직하게 체중이
실린 펀치가 작렬했을 때 무술에서 말하는 최고의 힘이 터지는
거란다. 그게 곧 일종의 발경이 된다.


임씨가 장으로 기자의 복부를 밀어보였다. 추장(推掌). 허투루
보낸 수련 세월이 아니다. ‘울컥’하는 진동이 밀려온다. 장은
보통 손목 부분에만 힘이 들어가도록 쥐기 마련이다. 팔은 자연
스럽게 안으로 굽히되 의식적으로 힘을 뺀다. 대신 몸으로 미는
식으로 장을 쳐낸다. 손목을 한순간에 ‘꾹’ 내려 누르는 힘과
팔굽을 펼쳐 ‘퉁’ 튀기는 것이다.

허리힘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주먹은 표면에 부딪는 물리적
인 충격을, 상대적으로 장은 내장을 상하게 하는 침투력을 최고
로 삼는다. 고수의 장을 맞고 내상을 입어 몇달 동안 시름시름
앓았다는 얘기가 꾸며낸 것만은 아니다. 손바닥을 뒤집는대로 막
측한 변화를 꾀할 수 있는데다 허리로 돌아갔다가 되돌아나오는
주먹보다 불필요한 예비동작이 적은 관계로 고수들일수록 장을 선
호한다.

임씨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한 채 항아리를 끌어안듯하는 포장(
抱掌), 손끝을 치켜 세워 도수로 쪼개는 벽장(劈掌), 장심(손바
닥 중심)을 위로 떠받치듯 올려치는 앙장(仰掌) 등 8개 기본 장
법의 독특한 운용법을 설명한다. 그는 이어 팔괘장은 최소 일갑
자(60년)는 해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술이라 했다.
팔괘 원리에 따라 곡선의 움직임에서 직선적인 공격과 방어동작이
어우러지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술은 고강해진
다. 내공이 쌓이고, 팔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 신묘한
변화가 깊어지기 때문이란다.


원주를 돌다보면 의식과 함께 몸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원주를 돌며 얻는, 몸속에 잦아드는 충만된 에너지가 그의
삶을 지탱해준 원초적인 즐거움이요, 근본적인 힘이 됐다. 그
힘으로 임씨는 팔괘음악까지 만들었다. ‘40년짜리’ 창작곡이라
는 기타 연주곡엔 ‘윤회’ ‘수레바퀴’ 등의 곡명이 달렸다.
세 곡조를 듣는 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박상문 사진부장은
“끊어질듯 이어지는 애절한 선율에 팔괘를 타고 휘도는 듯한 번
뇌와 해탈이 동시에 묻어나는 것 같다”고 평했다. 배웅나온 팔
괘도인 임창수는 아쉬운듯 헛개나무차 한봉지씩을 기자일행에 건
넨다. 그라고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휑하니 속리산으로 들어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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